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캐서린 헵번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atharine_baby.jpg|width=100%]]}}} || || 4살 때 || 1907년 5월 12일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의 부유한 집안에서 6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캐서린 마서 호튼 헵번[* Katharine Martha Houghton Hepburn. 1878 – 1951.]은 [[마거릿 생어]]의 동지였으며, 코네티컷 여성참정권 협회의 회장을 역임한 명망 있던 운동가로, 헵번을 [[여성참정권]] 운동에 동참시켰다. 아버지 토머스 노발 헵번[* Thomas Norval Hepburn. 1879 - 1962.]는 하트퍼드 병원의 [[비뇨기과]] 전문의로, 대중에게 [[성병]]에 대해 알리는 시민단체 미국 사회 보건 협회[* American Social Hygiene Association. 2012년 American Sexual Health Association로 개명했으며 현재도 [[https://www.ashasexualhealth.org/|명맥을 유지 중]]이다.]를 설립하는 과정에도 참여했다.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편견과 달리 가정에 충실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좋은 어머니들이라는 점을 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헵번을 포함한 자녀들과 찍은 사진들이 신문에 몇 번 실린 적이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atharine_Martha_Houghton_01.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atharine_Martha_Houghton_02.jpg|width=100%]]}}} || ||<-2> 둘 다 제일 오른쪽이 헵번이다 || 헵번의 부모님은 머리를 스스로 짧게 치고 자신을 "지미(Jimmy)"라고 불러달라고 하던 활동적인 헵번을 하트퍼드 골프 클럽에 등록 시켜줬다. 헵번에 따르면 양산을 들고 따라다니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캐디가 총 두 명이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유서 깊은 부촌 펜윅(Fenwick)에도 자주 데려가 헵번이 다양한 운동 과외도 받게 했다. 1913년 가족이 펜윅에 휴가용 저택을 구매하며 제2의 집으로 삼은 덕분에 헵번은 코네티컷 여성 주니어 골프 대회에 출전해 준결승전까지 오르고 기사에 언급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당시 평균 타수는 80대 초반이었다고 한다.] 이후 골프는 헵번의 일상에서 큰 일부분이 되었다. 한 프로 골프선수는 우연히 헵번이 골프하는 사진을 보고 [[https://irishgolfer.ie/latest-golf-news/2022/02/15/what-impressed-harrington-about-legendary-hollywood-actress-katharine-hepburn/|그립이 훌륭하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이를 반영해 [[하워드 혹스]]의 <베이비 길들이기>에서 첫 등장할때 골프를 치며 등장한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비단 이것 뿐만이 아니라 실제 헵번에게서 따온듯한 설정들이 더 있다. 코네티컷주 부자 가문 출신이라던가 독립적이고 드센 성격이라던가.] 진보 성향의 부모님은 토론을 통해 헵번에게 독립심, 인내, 용기를 길러주었다. 헵번은 빅트롤라 [[축음기]]가 필요한 [[나바호]]족 원주민이 있다는 걸 안 뒤 자발적으로 펜윅의 집 뒷마당에서 친구들과 [[미녀와 야수]] 공연을 올리고 이웃들에게 입장료로 50센트씩을 받아 총 60달러를 모금해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헵번은 "특별한 부모님들"과 같은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 어린 시절의 경험이 배우로서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헵번은 평생 가족과 가깝게 지냈다. 외가 친가 양쪽 가계에 모두 [[자살]] 경향이 있었다. 변호사였던 헵번의 큰아버지는 1915년 자택 4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고, 의사였던 작은아버지는 1921년 차고를 완전히 밀폐하고 차의 엔진을 켠 채로 운전석에 앉아있다가 질식사했다.[* 헵번의 오빠 톰이 자살하고 몇 주 뒤에 일어났다.] 외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형은 각각 1892년과 1897년에 총으로 자살했다. 전부 신변에 뚜렷한 문제도 없었다. 이런 경향을 물려받은 오빠 톰[* Thomas Houghton Hepburn.]도 여러 번 자살 조짐을 보였다. 집에서 [[올가미]]를 목에 걸었다가 들키기도 했다. 걱정한 부모님은 기분 전환을 하라고 1921년 오빠를 헵번과 함께 대모인 메리 토울[* 어머니의 브린 마 칼리지 동창이었다.]의 저택으로 여행을 보냈는데, 오빠는 우연히 낮에 보게 된 연극 속 장면을 모방해 대모 댁 다락방에서 홑이블을 찢어 급조한 밧줄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그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헵번이었다. 당시 오빠는 15살이었고 헵번은 13살이었다. 경찰의 면밀한 조사 결과는 오빠의 강렬한 자살 의지를 낱낱이 드러냈지만,[* 서까래에 매단 밧줄이 너무 길어 목을 매달고 나니 발이 땅에 닿자, 무릎을 꿇어 밧줄이 팽팽해지도록 유도한 뒤 긴 시간에 걸쳐 숨을 거뒀다.] 부모님은 그저 장난을 치다가 잘못된 거라며 현실을 부인하고 다른 자식들에겐 이를 함구했다. 그러나 이 비극에 대한 은밀한 공유로 헵번과 부모님의 유대는 유달리 깊어졌다. 그러나 헵번은 다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불안에 시달렸다. 다니던 사립여학교[* Oxford School.]를 자퇴하고 [[홈스쿨링]]을 하게 됐다. 그 뒤로 헵번은 오빠의 생일인 11월 8일을 자신의 생일로 삼고 살았다. 헵번은 1991년이 되어서야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회고록 "Me: Stories of My Life"를 통해 자신의 진짜 생일을 대중에 고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